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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일대기

2019. 6. 6. 18:36

김원봉은 많은 영화에 자주 출연할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입니다. 영화에서도 많이 등장하고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김원봉에 대해서 알아볼려고 합니다.

많이 출연하지만 김원봉이 어떤사람인지 ,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였는지 모르시는분들이 매우 많으신거 같습니다.

mbc에서 이번에 김원봉을 주제로 이몽이란 드라마를 만들으니 그 걸 토대로 김원봉 일대기에대해서 적어보겠습니다.

김원봉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정치인이다.호는 약산, 본관은 김해이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며,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를 하여 임시의 정원의원,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영화 밀정을 보시면 조승우가 바로 김원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원봉의 유년 및 청년 시절


김원봉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녔으며 , 민족주의자 전홍표가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점찍은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50리쯤 떨어진곳에 있는 표충사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병법과 오자 병법등 병서를 읽었다.

그리고 김원봉은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무전여행을 떠나니, 당시 나이는 17~18살이었다.

이때 자신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황상규가 창설자 중에 하나였던 대한 광복회의 항일 무장투쟁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계기로 인해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원봉이 텐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에 들어간것은 19살때인 1916년 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어를 배우기전 우선 중국어를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동안의 광복회 회원들의 희망가 다르게 중국이 일본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저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1년여 고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사람이 김두전과 이명건이다.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의형제를 맺게하고 각각의 호를 지어주었는데 , 김원봉은 여기서 약산, 김두전은 약수, 이명건은 여성 이라는 호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세사람은 같이 다니게 된다. 1918년 9월 ,이 세사람은 중국으로 같이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륭 대학에 입학하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계 계통학교로 , 세사람이 함께 들어간곳도 영어과 였다.

1919년이 되자 김원봉은 여운형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세상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말을들으며 ,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국 같은 약소민족을 위해 자신들과 다를바 없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김약수,이여성과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직접 길림으로 가서 그의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김원봉의 한일 무장투쟁 의열단 활동


김원봉은 길림을 거쳐 봉천에서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3.1 운동 소식을 들었으며 , 국내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국내로 돌아간 이들과 다르게 무장력을 갖추었을때만이 독립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1919년 2월22세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 및 폭탄 제조법등을 수료하게 된다.

신흥 무관학교는 체계적인 지휘관을 양성하여 조직화된 광복군을 양성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준비되기 까지가 너무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9월 학교에서 자퇴를 하였으며 새로운 개념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밀양,대구 일원에서 3.1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해온 사람들이 만나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에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이게 된다.

양건호,한봉근, 곽재기 ,김옥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 본거를 파괴할것을 결의하였다. 의열단을 조직하여 황상규가 단장의 백에 취임하였으며 단원은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으로 모두 13명이 모이게 된다. 의열단의 이름은 공약 제1조에 천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의"와 맹렬의 '열'을 따와서 의열단이 만들어 지게 된다.

그렇게 무장투쟁을 하게 되는데 암살 대상으로 정한것이 7가지 부류 였으니 ,이른바 칠가살로 다음과 같았다.


1.조선 총독 이하 고관

2.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대만 총독

4.매국적

5.친일파 거두

6.적의 밀정.

7.반민족적 토호열신


그리고 위에 다섯곳은 의열단의 파괴 대상이었다.

1.조선총독부

2.동양척식 주식회사.

3.매일 신보사.

4.각 경찰서.

5기타 왜적 주요 기관


(조선총독부를 해체시킨 모습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령 조선와 제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제국이 식민지 조선에 설치한 통치 기관이다. 

설치는 1910년에 설치되었으며 1945년 미군정에 행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해체가 되었다.

이걸 김원봉이 파괴해야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종래의 한국통감부를 대신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한것이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통독 아래 5부 9국의 체제를 갖췄으며 총독은 일본군 육군이나 해군대장 출신중에서 임며되며 ,조선의 입법 ,사법,행정의 모든 정무를 총괄,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덴노에게 상주,재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고 한다.

거의 우리나라를 통제하는 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김원봉의 파괴1순위는 이러한 조선총독부였다.


(동양척식 주식회사)

김원봉이 이걸 파괴하려고 한 이유는 일본 제국이 조선 및 대만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를 위해 설립된 국책 회사이기 떄문이다.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한국통감부가 설치된지 3년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을 가져갈려고 이득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식산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 사업에 이바지 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목표대상 이었다.


김원봉의 파괴 대상 매일신보


일제강정기에 발행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중 일본어 판인 경성일보와 영어판인 서울프레스와 함께 발행된 조선어+일본어판 기관지였다.

이 신문의 전신은 원래 양기탁,어니스트 베델이 설립한 대한 매일신보이지만 1910년 경슬국치가 일어나고 단 하루만에 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대한"을 뺀뒤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재출범하였다.

배델과 양기탁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이후 약화된 상태에서 인수를 하였다.

일제가 국채 보상 운동 횡령사건을 조작한 다음 배댈과 양기탁의 위치를 흔들었으며 비밀외교로 영국 영사관에서 체포되어 옥살이를 살았기 떄문에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가장 반일적인 논조를 가졌던 대한매일신보였던 만큼 일제에겐 큰 눈엣가시였으며 큰 영향력을 가젔던만큼 빠르게 입수하여 오히려 총독부 기관지로 바꾸어서 계속 조작을 해왔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활약들


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기며 ,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에 위치를 이동한다. 중국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에서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당시 이승만이 주도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노선을 반대하는 한인들한테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수 있기 떄문이다.

의열단이 거행한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밀양 폭파 사건'이다.

하지만 곽재기,이성우,신철휴,김수득,한봉근,윤세주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있다가 독립운동자 검거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 경부와 그 부하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검거되어 황상규 ,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김원봉이 의열단에 단장을 맡게 된다.

이후 김원봉은 박재혁,최수봉,김익상을 지휘하며 각각 부산 경찰서,밀양 경찰서,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였다.

그이후에도 일본국 대장을 저격하게 되며 무장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후 조석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김원봉은 최종덕과,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사회주의자 김한과 암살,파괴공작을 하려다 김한이 검거되게 된다.

그이후로도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 김재진의 밀고로 자절되고 만다.

압수된 물품만 건물 파괴용 폭탄 6개와 방화용 17개,암살용 13개 등 36개 뇌관 6개,도화선 6개,도화선과 연결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361부 ,그리고 협박문 548장이 었다.


이것이 황옥 경부폭탄사건이다.

1923년 황궁 정문앞에 있는 이중교 다리에 폭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키고 그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게 된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일본 경찰한데 당한 살읹적 고문과 단식 투쟁으로 몸이 약해저 한달 보름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에 의한 암살과 파괴사건이 일어났다.하지만 빈번이 실패와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1924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대중 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승하여 상하이에서 '청년 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 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으며, 이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비판하기 까지 한다.

그리하여 의열단원의 이탈과 함께 자금이 부족해져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1925년 김원봉은 2월 20일과 21일 동아 일보를 통해 "민족 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할것이며 사회운동자가 곧 민족 운동자가 되어야 할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우파 계열의 민족주의 운동과 좌파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이 합치 되어야함을 역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조직 및 임시정부 참여


1934년 3월 ,한국대일 전선동일동맹 제 2차 대표대회에서 "종래와 같은 중앙간부만의 기관에 국한 시키지 않고 ,가맹단체 소속 '다수 투사'를 집결시켜 적극적인 공작을 전개하기로 한다.

가맹단체를 포함한 모든 혁명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원을 동일 동맹에 귀속 시켜 일원화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도 해체한다. 라는 의견이 제안되었으며 김원봉과 의열단은 이주장에 대해 찬성하기로 한다.

그결과 1935년 7월 4일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출현한 민족 혁명단의 총서기가 된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거기에서 조소앙은 정강,정책 기초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 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1938년 단원들의 많은 탈당과 정치적 이념이 달라 김원봉은 무장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이 된다.

물밀듯 처들어오는 일본군에 맞선 무한 방위전에 참전하는것을 시작으로 여러군대를 옮겨 다니며 항일 전투를 하던 조선의용대는 화북으로 가서 무정이 조직한 '조선의용군'이다 된다.

조선 의용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에 힘썼으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며 조선의용대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으며 중국측의 지원도 중단되며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 1지대로의 편입에 동의하였으며 1942년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들어가 합류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22일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게 되었다.

(1941년 3월1일 31절 22주년 기념식이다. 왼쪽부터 김구,조소앙,신익회,김원봉 이다)

그 이후 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며 우익과 좌익으로 나눠 지게 된다. 여기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게 되니 이부분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남북 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조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3월 김원봉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김원봉이 광복후 남한 지역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림 '전 조선젲정당사 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김구,김규식,박헌영,이극로 등과 함꼐 남측 정치 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협상에 참가하였다. 이때 남북 연석회의 주석단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김원봉은 축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연석회의 전체의 사회를 맡기도 하였다. 그 뒤로 그는 북한 지역에 물렀으며 더이상 남한 지역에 내려오지 않았다.

다만 월복이전에 김원봉의 비서였던 사마로에게 '북조선은 그리가고 싶지 않은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수가 없다"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월복이 어쩔수 업섰음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김원봉의 최후

(사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왼쪽에 선글라스 낀 인물이 김원봉이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가 한대도 없었고 군사력도 매우 부족하였다. 하지만 북한에는 240여대의 소렌져 탱크와 수십만의 중국 팔로군 출신 조선족 군인들이 배치되어있었다.

그래서 1949년 김일성은 전 조선을 공산화하여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다니며 전쟁승인을 받으려고 여라 차례 소련과 중국을 찾아다니게 된다.

하지만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두달의 짧은 기간만에 남쪽을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이득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전쟁을 이루어젔으며 남침을 반대하데다 납북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도와주며 이들과 함꼐 평화통일을 주장해서 김일성의 눈밖에 났었던 김원봉은 1958년 11월 중국 국민당 자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하지만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조선 의용대 출신 김학철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김원ㅂ농이 분에 못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증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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